보성으로 떠나는 운치있는 여름여행
비가 잦은 철이다. 이럴 땐 마음까지 다 눅눅해지는 느낌이다. 뭔가 산뜻한 분위기가 그리워진다. 비에 젖은 차밭과 전통 돌담? 의외로 운치 있는 조합이다. 이 같은 청신한 분위기를 느낄 만한 여행지가 있다. 차밭으로 유명한 전남 보성이 그런 곳이다. 특히 전통이 살아 있는 '강골마을'을 찾으면 '아직도 이런 곳이' 라는 신선함에 안도감마저 다 느껴진다. 독특한 건축미를 자랑하는 옛집 대청마루와 초록의 이끼를 뒤집어 쓴 돌담길, 대숲과 정자가 어우러진 공간이란 전통이 빚어낸 최고의 여름 휴식처가 된다. 거기에 '때 타지 않은' 삶의 터전을 지켜 가는 마을사람들의 푸근한 인정까지 맛보게 되니 마음속의 외갓집이 바로 여기에 있다.
보성=글·사진 김형우 여행전문 기자 hwkim@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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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여행지가 있다. 전남 보성이 그곳이다. 맑은 날에도 비가 내려도, 전통마을 돌담길과 차밭은 여유와 청량감을 맛보게 해준다. 사진은 강골마을의 '소리샘' 주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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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이 살아 있는 '강골마을'
전남 보성(寶城)은 지명부터를 아예 '보배로운 땅'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암산 등 임금 '제(帝)'자를 가진 명산과 해산물의 보고인 득량-여자만, 그리고 내륙호인 주암호까지 산과 바다, 호수 등 귀한 터전들을 한가득 품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잘 가꿔진 차밭과 다양한 문화유산 등 명품 여행지로서의 박자까지 고루 갖추고 있으니 그야말로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그중 사람 사는 냄새 진하게 배어 있는 '강골마을'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이 동네는 용케도 개발을 비켜가며 옛 것을 지켜 전통과 추억이 그리운 도시민들에게 흡족한 쉼터가 돼 주는 곳이다. 마을의 행정지명은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동네 사람들은 '득량마을', 또는 '강골마을'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은 400년 전 생겨났다. 광주 이 씨 집성촌으로, 현재 26가구가 살고 있는 아담한 마을이다. 작은 마을엔 인물들도 즐비하다. 6선 국회의원(이중재), 대법원장(이용훈) 등 쟁쟁한 인물들이 이 곳 출신이다. 때문에 보성 사람들 사이에서는 '강골 가서 벼슬자랑, 머리자랑은 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강골마을은 개발과 상술이 스며든 여느 전통 마을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옛 모습 그대로의 생활 유적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마을 안길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초록의 이끼를 뒤집어 쓴 돌담이며 작은 도랑을 따라 곡선을 그리는 골목길.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마을 배치 등 굳이 풍수를 따지지 않더라도 안온한 느낌을 듬뿍 받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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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식래 가옥의 장독대. 안채는 초가인데 반해 장독대에 기와를 얹어 놓은 모습이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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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수록 흥미로운 강골마을의 전통한옥
마을에는 30여 채의 집이 있다. 그중 두세 집을 빼고는 모두가 전통 한옥이다. 이 중 3채의 가옥과 1채의 정자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돼 있다. 집들은 전형적인 남도가옥 형태를 띠고 있는데, 타지방의 양반 종택과는 달리 잘 꾸며놓은 인위적 정원이 없다는 게 특징이다. 대신 곡식을 말릴 수 있는 널찍한 마당과 곳간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을에서 첫번째 방문지가 되고 있는 '이식래 가옥(1891년 건립)'의 경우 안채와 사랑채는 초가지붕인데, 곳간과 장독의 대문간에는 기와를 얹었다. 이 집안사람들의 평소 곡식과 간장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뒤뜰 꽃밭은 집안 여성들을 위한 배려의 공간으로, 뒤안에 화단을 마련했다.
경복궁 교태전의 '
아미산'에서 엿볼 수 있는 건축양식으로, 축대를 쌓고 꽃밭을 만들어 볕이 잘 들게 했다.
솟을대문이 기품 있는 이용욱 가옥(1904년 건립)도 볼만하다. 우선 이 집은 자연을 조경화 한 경우다. 집은 사랑채, 중간문채, 안채로 구분돼 있는데, 사랑채 마당보다 안채 마당을 돋웠고, 토방과 마루를 높여 안채 누마루에서도 바깥 조망이 시원스럽다. 특히 중간문채를 둬서 동구 밖 앞산과 멀리 떨어져 있는 선비바위가 코앞에 펼쳐지는 듯 한 자연 원근법을 적용했다. 널찍한 마당은 실용적 공간이다. 곡식을 말리거나 쌓아두기 편한 공간으로 활용했다.
특히 이용욱 가옥의 기품은 '소통'의 공간에서 더 돋보인다. 원래 이 집의 땅이었는데 마을사람들을 위해 '소리샘'이라는 우물을 파서 개방했다. 우물 바로 옆 담벼락에는 네모난 구멍을 뚫었다. 이를 통해 제사나 잔치 음식을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우물가에서 들려오는 서민들의 소리를 귀담아 들었다. 이를테면 양반과 서민들의 소통의 창구인 셈이다.
강골마을의 고풍스런 멋과 옛 정취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정자 열화정(중요민속자료)이다. 대숲 옆으로 난 돌담길을 돌아 계단을 오르자면, 운치 있는 정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자태가 담양의
소쇄원 못지않다. 대문을 들어서면 팽나무 그늘 아래 연못이 있다. 누각형 마루에 올라앉으면 그 분위기에 절로 '여유(餘裕)'라는 두 글자를 떠올리게 된다.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풍경소리가 실려 청신함을 더한다. 조선
헌종 때 지은 건물이다.
열화정 오른쪽 대숲도 운치 있다. 대나무숲 사이에 드문드문 박힌 노송이 웅대하다. 그중에는 570년 수령의 고목도 있다. 대밭의 소나무들은 곧게 자란다. 때문에 좋은 기둥감을 마련할 수가 있다니 이 또한 선인들의 지혜다.
▶마을의 또 다른 보물 '사람' & 체험
강골 마을의 또 다른 보배는 사람이다. 오늘의 강골마을은 동네 사람들의 전통보존에 대한 열의 덕분이다. 지금껏 숱한 개발의 유혹을 뿌리치고 온전한 마을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합심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박홍주 정보화마을 위원장이 자리하고 있다. 박 위원장은 그간 이정민(도의원)-박향숙씨 부부와 마을 발전을 이끌어 왔다.
'무릇 전통마을이란 옛날 그대로의 모습과 정신을 온전히 지키는 데 있다'는 게 이들의 일념이다. 때문에 몇 년 전 군에서 추진하려던 민속촌 건설도 백지화가 됐다. 개발 이익에 대한 유혹도 있었지만 보전의 가치를 택했다.
박 위원장은 "우리 조상들의 삶의 체취와 정서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마을, 진짜 옛날 외갓집 동네 같은 그런 마음의 고향을 간직해가는 게 우리의 바람"이라며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와 더불어 향후 귀향하는 사람들이 자칫 강골마을의 보존 정서 보다는 편리를 택할까봐 내심 걱정부터 앞선다"고 요즘의 고민거리도 토로했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체험 마을'을 내세운 강골마을은 가족단위 체험객 사이 인기를 끌고 있다. 오봉생가, 아치실댁 등 마을의 여러 고택에서 체험 할 수 있는데, 하룻밤 4~5만원(4인 가족 기준) 선이다. 식사는 아침-저녁을 마을 어귀 체험관에서 인심이 가득 담긴 순박한
시골밥상(1인, 한 끼 6000원)으로 맛볼 수 있다. 프로그램에 따라 갯벌체험과 녹차밭 기행 등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단, 마을 체험은 단체는 받지 않는다. 가족단위 내방객만 받는다. 이곳은 단순히 놀고먹는 관광지가 아닌, 전통의 가치를 느낄 수 있고, 진정한 도-농 소통의 장이라는 마을 사람들의 가치관 때문이다. 문의(061-853-1333 / http://dr.invil.org)
◆비오는 날 '차밭 & 휴양림'의 운치 속으로
'차밭'은 보성의 대명사격이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 초록의 싱싱함을 맛볼 수 있어 근사한 녹색기행을 즐길 수가 있다. 특히 요즘처럼 비가 잦을 때면 더 운치가 있다. 여름비에 젖은 차밭은 더 싱싱하게 변하고, 운무가 내려 앉아 분위기가 한결 몽환적으로 바뀐다. 특히 아름드리 삼나무 진입로를 갖춘 대한다원의 경우 안개 자욱한 삼나무 길은 환상 그 자체다.
보성에서는 제암산 휴양림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160ha의 방대한 숲속에 편백나무,
고로쇠나무,
굴참나무 등의 멋진 숲이 펼쳐져 있다. 특히 휠체어를 타고도 숲길 산책이 가능하도록 데크를 마련해둬 편안한 삼림욕을 즐길 수가 있다. 또 자연계곡과 수영장 등 더위를 쫓을 만한 시설과, 숙박동, 몽골텐트 등을 갖춰 가족 단위 나들이를 즐기기에도 그만이다. 휴양림 사무소 곽희택씨는 "제암산 처럼 자연계곡을 품고 있는 휴양림이 많지 않다"면서 "이른 봄은 고로쇠, 가을엔 단풍, 겨울 숲도 아름다워 남도 최고의 휴양림"이라고 자랑했다.
◆문학기행의 명소 '벌교' & 율포 해수풀장
보성과 벌교는 우리 현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아픔의 땅이다. 작가 조정래는 그 지난한 과정을 베스트셀러 소설 '태백산맥'으로 엮어냈다. 벌교읍 태백산맥문학관에는 작가가 소설을 구상하고 쓰고 출간되기까지 6년간의 집필과정, 취재노트, 육필원고, 언론 보도 내용, 사용하던 물품 등을 전시해두었다.
전시관 옆에는 소설 속 '현부자집', 박씨 제각이 자리하고 있다. 한-일 주택양식이 혼재된 가옥으로, 소설에서처럼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하는 명당이다. 특히 대문 2층 누각은 마을앞 논이 한 눈에 들어 올
만큼 조망이 좋다.
중도방죽, 부용교, 철다리까지 이어지는 벌교포구 갈대밭은 순천만의 것과는 또 다른 운치를 자아낸다. 바다로부터 좁다랗게 포구로 향하는 갈대밭 물가에서는 요즘도 둥근게가 곧잘 잡힌다. 게를 잡던 이 마을 김태성 옹(74세)은 "자식들이 인자는 일을 못허게 흔게 깝깝시러버서 이렇게 안놔왔다요. 똥똥하다고 해서 '둥근게' 라고 허는디, 게장으로 해먹으먼 겁나게 맛나다"며 엄지를 치켜 올렸다.
뻘이 발달한 벌교에 물놀이 명소가 있다. 율포 해수풀장이 그곳이다. 해변가에 심해수를 끌어 올려 근사한 워터파크를 마련해두었다. 뿐만 아니라 해변 개펄에 모래를 채워 해수욕과 갯벌체험을 즐길 수 있게 했다.
◆여행메모
▶가는 길=호남고속도로~동광주IC~29번국도 따라 화순~보성~보성읍내 2번국도~벌교-순천 방향 845번 지방도~득량 삼거리 주유소 앞 좌회전(851번 지방도~강골마을
▶뭘 먹을까?
◇중앙식당=보성은 겨울꼬막, 녹돈 등 미식거리도 풍성하다. 그중 보성읍내에서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 32년 전통의 중앙식당이 토박이들 사이 별미집으로 통한다. 봄 주꾸미, 여름엔 서대회, 가을 전어회, 겨울 꼬막 등 계절의 진미를 맛볼 수 있다. 백금림사장은 "조기매운탕-녹돈주물럭(각 1만원), 불낙-갈치백반(각 1만 2000원)을 제일 자신 있는 메뉴"라고 내세웠다.
◇짱뚱어탕 & 구이=요즘 보성에서는 짱뚱어탕과 구이가 별미다. 벌교 두문포산장 등 맛집이 여러 곳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