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아름다움

태안에 있는 사당

코알㉣r 2012. 6. 10. 01:56

숭의사(崇義祠)

이 숭의사는 남면 양잠리 338에 자리한 소주 가씨(蘇川賈氏)의 사당(祠堂)을 이름인데, 이는 조선조(朝鮮朝)의 철종(哲宗)2년에 왕명(王命)에 따라 세원진 것으로서, 가유약(賈維약)·가상(賈祥)·가침(買琛)의 삼세(三世)를 기리는 이른바 이충일효(二忠一孝)의 불천지위(不遷之位) 사우(祠宇)와 정문(旌門)을 하사(下賜)받은 것이다.

숭의사(崇義祠)

사당을 건립(建立)케 된 연유를 살펴 보면, 소주 가씨의 중시조(中始祖)인 가유약(貴維약)은 중국(明國)의 명성 높은 장군으로, 선조(宣祖)26년(1592)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내조(來朝)하여 왜군(倭軍)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우고 선조(宣祖)29년(1595)에 귀국(歸國) 하였다.

그러나 선조(宣祖)31년(1597)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가유약 장군은 아들 가상 장군과 손자인 가침을 데리고 다시 내조(來朝)하여 다음해인 1598년에 가유약과 아들 가상은 마귀제독(麻貴提督)과 함께 남원(南原)에서 왜적(倭敵)을 크게 무찌르고, 다시 부산(釜山) 전투에 임하여 용전 분투(勇戰奮鬪)하다 불행히도 부자가 함께 전사(戰死)하니 이곳이 부산 도독포(지금의 子城臺)였다.

가유약의 손자인 가침은 영내(營內)에 머무르고 있다 이같은 비보(悲報)를 접하고는, 대성 통곡(大聲痛哭)하며 즉시 전지(戰地)로 달려나가 원수를 갚으려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한채 조부(祖父)와 부친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葬事)하고 시묘(侍墓)하였다. 시묘를 마친 가침은 일생 동안 조선국에 살면서 왜국(日本) 쪽을 향해 한 번도 앉은적이 없다고 전한다.

그 후 가침의 아들인 성(晟) 호(昊) 병(昺) 수(遂) 등 4형제가 조국(祖國)으 로 돌아가기 위해 대륙과 가까운 태안으로 왔으나 선편(船便)이 여의치 못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대로 태안에 정주(定住)하게 되었다.

이렇게 정주하면서 자손이 번창하고 따라서 가세(家勢)가 확장되어 가니 후손들이 선대(先代)의 유공(有功)함을 조정(朝廷)에 건의하여 마침내 그 뜻이 이루어지니 이것이 숭의사를 짓게 된 동기가 되었다.

이 숭의사는 지난 1988년 8월 30일에 문화재 자료 제300호로 지정되어 현재 관리중에 있다.

 

 

안양사(安陽祠)

이 안양사는 태안군 근흥면 안기리 832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는 간재전우(艮齊田愚) 선생과 노백 최명희(老栢 崔命喜) 선생의 영정과 위패가 배향(配享)되어 있다.

안양사(安陽祠)

전우(1841~1922) 선생은 성리학자(性理學者)로서 자는 자명(子明)이고 호는 간재이며 본관(本貫)은 담양(潭陽)이었다.

전우선생은 당시의 거유(巨儒)였던 신응조(申應朝)의 권유를 받고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흥미를 느끼게 되는데, 특히 임헌희(任憲晦) 문하에서 20여년간 학문을 배워 윤치중(尹致中)·서정순(徐廷淳)과 더불어 그의 뛰어난 제자(高弟)가 되었다.

또한 전우선생은 노론(老論) 학자들의 학통(學統)을 이어 이이(李珥)와 송시 열(宋時烈)의 사상을 신봉(信奉)하면서도, 특히 이이의 학설을 존중했으나, 그러면서도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양설(兩說)을 모두 배척하고 결국은 절충적인 입장을 취했었다.

전우 선생은 조선조(朝鮮朝)의 고종(高宗)19년(1882)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이 되었으며, 그 후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使) 중추원 찬의(中樞院責議) 등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모두 사양했다.

그리고 고종 33년(1896)에는 최명희의 주선으로 근흥면 수룡리(당시는 수창동)에 와서 5년간 후진 교육에 몰두(沒頭)하여 마침내 서태안 지역의 유풍(儒風)을 크게 진작(振作)시켰다.

그 후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통탄(痛歎)함을 금치못한 전우선생은 즉시 상소(上疏)하여 을사오적(乙巳五賊)인 이완용(李完用)·이지용(李址鎔)·이근택(李根澤)·권중현(權重顯)·박제순(朴齊純) 등을 참수(斬首) 하라고 했다.

전우선생은 모든 관직을 다 사양하고 낙향(落鄕)하여, 오로지 후진 양성에 최선을 다하니 그의 제자가 무려 2,000여명이 되었다고 한다.

이같이 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주로 전라도(全羅道) 지역인 광주·나주·함평 등이 제일 많고 충청도(忠淸道)의 서태안(瑞泰安) 지역엔 노백 최명희 선생을 비롯하여 40여명에 불과하였다.

수제자(首弟子)인 노백(老栢)은 생전에 스승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향현사(鄕賢祠)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스승보다 오히려 먼저 타계(他界)하니, 노백의 동문들이 그 뜻을 이어 받아 서기 1929년에 사우(祠宇)를 짓고 토담을 축조하여 제향일(祭享日)을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로 정하고 제향하고 있다.

그 후 40년이 지난 1969년 9월 9일에 사림(士林)들의 동의에 따라 고제(高弟)인 노백의 영정과 위패를 그의 스승인 전우의 영정이 안치되어 있는 안양사에 함께 봉안(奉安)하게 되었다.

우리 고장 출신이 아닌 전북 전주(全北全州) 출생인 간재 전우 선생의 영정을 본군 근흥면에 자리한 안양사에 안치하고 제향을 올리는 것은, 전우 선생이 대성리학자로서 학문적 업적이 뛰어나고, 또한 생전에 본군에 와서 5년간 후진 육성에 공헌한 그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서이다.

이성군사당(利城君祠堂)

 

 

이 이성군 사당은 소원면 송현리 2구의 대소산(大小山)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데, 조선조(朝鮮朝)의 현종(顯宗) 7년(1666)에 세워진 것으로서 이성군을 배향(配享)하는 사당이다.

이성군사당(利城君祠堂)

이성군(1489~ 1552)은 성종(成宗)의 9남으로 태어났는데, 이름은 관(慣)이고, 자는 공숙(公肅)이며, 어머니는 숙용심씨(淑容沈氏)였다.

그는 연산군(燕山君) 3년(1497)에 이성군에 봉해지고, 문소전(文昭殿)·연은전(延恩殿)·종부시(宗簿寺)·사옹원(司甕院) 등의 도제조(都提調)를 역임하였다.

또한 이성군은 명종(明宗)이 즉위(卽位)한 1546년에 위사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이 되었으며, 그리고 회화(繪畵)에도 뛰어나 명종(明宗)의 어용(御容)을 추화(追晝)할 때 이를 직접 관장하기도 하였다.

이 이성군사당은 현재 그의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충령사(忠靈祠)

 

이 충령사는 남면 달산리 산 98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엔 석탄공 이존오(石灘公季存吾)의 신주를 배향(配享)하고 있다.

충애사(忠愛祠)

석탄공(1341~1371)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었는데, 자는 순경(順卿)이고, 호는석탄·고산(孤山)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였다.

고려 공민왕 9년(1360)에 문과 시험(文科試驗)에 합격하고 수원서기(水原書記)의 벼슬을 시작으로 사한(史翰)을 거쳐 공민왕 15년(1366)에는 우정언(右正言)이 되었는데, 이때 신돈(辛旽)의 난폭한 행동을 추궁하다 오히려 왕의 노여움을 샀었다.

그러나 이색(李穡) 등의 도움으로 극형(極刑)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어 갔다.

그 뒤 공주 석탄에서 은둔생활을 하다 마침내 울분으로 인한 발병으로 젊은 나이에 병사하고 말았다.

사후 대사성(大司成)에 추증되었으며, 여주(驪州)의 고산서원(孤山書院), 부여(扶餘)의 의열사(義烈祠), 무장(茂長)의 충현사(忠賢祠) 등에서 제향(祭享)하고 있다.

그리고 남면의 충령사에서는 매년 3월 15일(음력)에 제향하고 있는데, 그의 후손들과 군내 유림들이 다수 참제하여 석탄공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있다.

신돈의 전횡(專構)을 풍자한 석탄공의 시조 한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구룸이 무심탄 말이 아마도 허랑하다
중천에 떠이셔 임의 단니며서
구퇴야 광명한 날빗츨 따라가며
덥나니 」

 

 

충애사(忠愛祠)

이 충애사는 원북면 반계리 닻개에 자리하고 있는데, 1919년 기미(已未)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옥과 이종일(沃彼李種一)선생의 영정을 안치한 곳이다.

사당의 규모는 15평의 목조 와즙(木逋瓦葺) 건물로서 지난 1990년 5월 말에 준공 되었다.

충애사(忠愛祠)

옥파 이종일 선생은 서기 1858년에 원북면 반계리 닻개에서 태어나 호를 옥파 또는 묵암(默菴)이라 하였는데, 16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함으로서 그의 명석한 두뇌를 과시하였다.

그 뒤 1882년에는 수신사(修信使)의 일원으로 박영효(朴泳孝)와 함께 도일(渡日)하여 그곳의 개화(開化)된 사회 실상을 보고 귀국 하였다.

귀국 후 1898년에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에 피임되었으며, 동년 8월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한글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고 이어 같은해 9월에는 흥화학교(興化學校), 1905년엔 보성학교(普成學校) 그리고 이듬해는 보광학교(普光學校) 등 여러 학교의 교장 및 설립에 참가하여 교육사업에 전렴하였다.

1908년 대한협회보 발행인겸 편집인이 되고 이듬해는 대한민보 발행겸 편집인에 취임하여 제국신문의 강제 폐간으로 인해 다하지 못한 민중계몽에 열을 올렸으며, 또한 울분을 토했다.

1910년에는 다시 천도교회 월보과장과 보성사(普成社) 사장이 되고 4년 뒤인 1914년에는 천도교 구국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으며, 그로부터 5년 뒤인 1919년 2월 25일과 27일에 독립선언서 3만5천매를 직접 인쇄하였다.

동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운동에 참가 독립선언서를 직접 낭독하다 일경(曰本警察)에 체포되어 3년형 선고를 받고 옥고(獄苦)를 치루다 2년6개월만에 가출옥 되었다.

이렇게 옥고를 치루다 출옥한 옥파 선생은 조국 광복에 대한 의지를 조금도 굽히지 않고 오히려 외기(外氣)가 차면 찰수록 뿌리가 엉키는 엉겅퀴의 생리처럼 일경의 감시가 삼엄한데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왔다.

1922년엔 자주독립선언서(제2독립선언서)를 직접 작성하여 인쇄도중 일경에 압수 당했다.

이렇게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고 맹활동을 펴다 일경에 체포되어 갖은 곤욕과 수모를 겪으며 옥고를 치루었으니 어찌 건강에 지장이 없었으리요. 마침내 1925년에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채 향년 68세로 일생을 마치었다.

옥파의 유택은 본래 이태원에 마련 되었으나 1936년에 망우리로 이장하였다가 다시 1962년에 망우리(忘憂里)에서 국립묘지 독립 유공자 선열묘역(國立墓地有功者先烈墓域)으로 이장(移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홍현사(弘賢祠)

 

이 홍현사는 원북면 대기리(遠北面大基里)809에 자리하고 있는데, 낙분당 조목(樂分堂趙穆)을 제향하는 곳이다.

홍현사(弘賢祠)

조목의 자는 희보(熙甫)요, 호는 낙분당(樂分堂)이며, 본관은 평양(平壤)으로서 조인규(趙仁規)의 후손이다.

낙분당은 일찍 연일현감(延日縣監) 재직중에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아들 3형제를 불러놓고 숙의(熟議)한 끝에 왜병(倭兵)을 침략자로 단정하고 이를 무찔러 나라를 구하는 것이 국민된 도리임을 깨닫게 하여, 4부자는 마침내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굳게 맹세하였다.

4부자의 설득력 있는 호소에 수천명의 의병(義兵)이 단시일에 모집되었으며, 아울러 구국 일념으로 불타는 용맹과 사기는 하늘을 찌르듯 하였다.

이렇게 모집된 의병들은 조목 4부자의 지휘를 받으며 홍의장군 곽재우(紅衣將軍郭再佑) 의병장(義兵將)과 합세하여 일당백(一當百)의 정신으로 왜병을 무찌르는데 수차에 걸쳐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백전백승(百戰百勝)의 뛰어난 전법(戰法)으로 위세를 떨치었으니, 홍의장군이 이르는 곳은 산천초목이 부들부들 떨 정도였다고 하여 왜병들은 곽재우 부대가 나타났다고 하면 혼비 백산하여 도망쳤다고 한다.

이렇게 이름을 떨치었던 홍의장군과 더불어 왜병(倭兵)을 무찌르는데 공을 세운 조목의 공적은 길이 만세에 빛날 것이다.

홍현사는 지난 1989년에 준공되었는데 그 규모는 500평 대지에 사당은 20평의 단층 목조 와즙(木造瓦葺)으로서 총사업비 1억여원은 모두 종중(宗中)에서 부담했으며, 현재 사당의 관리는 그의 후손이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