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산 숲정이 숲은 비록 들판으로 바뀌어도 여산 숲정이는 호남의 관문으로 일찍이 천주교가 전래되어 수많은 신앙 공동체와 그만큼의 순교자들을 배출한 여산의 대표적인 순교 성지이다. 여산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은 호남 고속도로를 이용, 논산 나들목에서 연무대 방면으로 빠져 나와 약 1.5km 정도만 달리면 전주, 논산 방면으로 갈라지는 1번 국도를 만날 수 있다. 여기에서 전주 방향으로 좌회전해 충남 도경계를 넘어 조금 가면 오른쪽에 바로 여산 숲정이 성지와 왼편에 고딕식 여산 성당이 보인다. 여산 숲정이를 찾으면 우선 ‘여산 순교 성지’라고 쓰인 대형 기념비가 눈에 뛴다. 이 기념비에는 “이곳은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금산, 진산, 고산에서 잡혀 온 신자들이 순교한 곳으로 기록만도 22명이며 그 외에도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이곳에서 순교하신 분들의 무덤은 천호산 기슭 천호 공소 부근에 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여산 성지는 현재 “치명일기”(致命日記) 등에 기록된 순교자가 25명에 이르고, 구전으로는 50여 명 이상 신자들이 순교한 곳으로 참수, 교수는 물론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도 죽임을 당한 곳이다. 백지사형이란 붙잡혀 온 교우들의 손을 뒤로 묶고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를 여러 번 붙여 질식시키는 가혹한 처형 방법으로 수많은 교우들이 이 방법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 중 17명이 고산 넓은 바위 사람들이었다. 특히 당시 57세의 고령이었던 김성첨 일가 6명의 치명은 대아리(大雅里) 저수지에 잠겨 버린 ‘넓은 바위’(전북 완주군 동상면 광암리)의 대표적인 애화(哀話)로 남아 있다. 김성첨은 조카 김명언을 비롯해 정규, 정언 등 3형제와 그 아들 등 3대에 걸치는 6명을 포함해 한 마을 17명의 믿음이 모두 자기가 가르친 것이라고 진술했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칼 쓴 ‘죄인’들은 형장인 풀밭에 가서야 칼을 풀었고 얼마나 굶주렸던지 짐승처럼 풀을 뜯어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김성첨은 “우리는 이때를 기다려 왔으니 천당 진복을 누리려 하는 사람이 이만한 괴로움도 이겨 내지 못하겠느냐. 부디 감심으로 참아 받자.”며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부사가 교우들을 심문하고 사형을 선고한 여산 동헌에서 건너다보이는 숲정이는 지금은 숲이 아닌 논과 밭 가장자리로 변했다. 여산 본당은 선조들이 신앙을 증거했던 숲정이를 중심으로 부근 전답 4천여 평을 1980년 초 이미 사들여 성지 개발에 주력해 왔다. 여산의 성지 개발 사업은 크게 성지 순례 성당과 대형 십자가 건립, 예수 성심상을 조성한 주변에 나무를 심어 여러 해를 두고 숲정이의 옛 모습을 재현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여산 순교지에서 천호산을 옆길로 넘어 천호 마을이 가까운 거리에 있어 도보 성지 순례 코스로는 안성맞춤이다. 천호산 기슭인 이곳은 여산에서 8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로 비포장 산길이었으나 1987년 전주 자치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의 해를 맞아 말끔히 포장되어 있어 순례길이 더욱 가까워졌다. 2007년 10월 19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된 여산 숲정이는 익산시의 지원으로 2008년부터 본격적인 성지개발을 추진했다. 숲정이 일대 약 3만 3000㎡(약 1만 평)에 탐방로와 주차장, 분수대, 야외 성지 체험장, 피정의 집 등을 마련하는 공원화 사업을 순차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2009년 말 야외제대 및 중앙 광장 등을 새롭게 단장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 천호와 여산 성지 - 순교자들의 고향 전주 시내 북쪽에 호남 고속도로를 끼고 좌우로 있는 '여산 숲정이'와 '천호 성지'. 순례자들은 논산 인터체인지를 나와 먼저 여산을 순례하고, 이어 그 길로 문드러미재를 넘어 천호 성지에 닿을 수 있다. 반대로 이리 인터체인지를 나와 동북쪽으로 천호 성지를 찾아 본 후 다시 여산으로 갈 수도 있다. 해발 500m 천호산 아래에 위치한 천호(天呼) 마을(완주군 비봉면 내월리)은 본래 다리실 혹은 용추네로 불리던 전통적인 교우촌이었다. 후대에 그 이름이 '천호'로 바뀐 것은 박해를 받던 신앙 선조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하느님을 부르며 살던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선조들은 비밀리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곳 산간 지대로 모여들었고, 기해박해를 전후해서는 교우촌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천호 성지 맞은편에 있는 무능골과 인근의 시목동이 당시의 교우촌들이었다. 지금 이곳에는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이명서,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등 4명의 성인과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아우구스티노), 그리고 1868년에 여산에서 순교한 김성화(야고보) 외 7명의 무덤이 조성되어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 중에서 정문호, 손선지, 한재권 성인 등은 신리골(완주군 소양면 대성동)에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생활하다가 함께 체포되었고, 이명서 성인은 성지동(완주군 소양면 유상리)에서 살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4명의 성인 시신들은 다리실의 무능골과 시모동, 유상리 막고개, 진안의 어은동 모시골에 안장되었다가 천호 성지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그러나 전주의 성인 중에서 막고개에 안장되어 있던 조화서와 정원지 성인의 유해는 훗날 후손들이 다른 곳으로 이장하였으나 유실되었다. 또 조화서 성인의 아들로 1866년 12월 18일 서천교(전주시 서완산동) 밑에서 매를 맞아 죽은 조윤호(요셉) 성인의 시신도 다리 너머에 있는 요머리 고개에 안장되었으나 끝내 그 곳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이처럼 성인 부자가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순교한 이유는, 조선의 형률에 '부자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칼로 처형할 수 없다'고 규정한 때문이었다. 1909년에 되재 본당의 베르몽 신부와 천호 공소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영혼이 깃들여 있는 천호산을 매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39년에는 이곳 순교자 무덤 앞에 순교비와 십자가를 건립하였으며, 1983년에는 유해 발굴과 확인 작업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1988년에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모셔져 있던 이명서 성인의 유해를 손선지, 한재권, 정문호 성인의 곁으로 옮겨 안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김성화(야고보) 외 7명의 시신이 천호 성지에 안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어 1988년에는 병인박해 때 공주에서 순교하여 수청리에 안장되어 있던 김영오(아우구스티노) 순교자의 시신도 천호 성지로 이장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천호 성지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순교자들의 고향이 되었다. 이 밖에도 전라도 지역에서는 병인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곳곳에서 순교하였다. 광주대교구의 '나주 무학당'(나주 초등학교 자리)에서도 순교자가 탄생하였고, 전주 시내 전주천 다리(일명 싸전 다리) 건너에 있는 '초록 바위'(전주시 완산구 서서학동)에서는 미처 피어나지도 않은 성 남종삼의 아들 남명희와 성 홍봉주의 아들이 어린 나이로 1년 동안 옥고를 치른 다음 1867년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또 '여산 숲정이'(익산군 여산면 여산리)에서는 고산, 진산, 금산 등지에서 끌려 온 신자들이 1866년 겨울에 백지사, 교수형, 참수형 등으로 순교하였다.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여산의 순교자들 23명 중에서 17명은 고산 땅 넓은 바위(廣岩, 완주군 동산면 광암리)에 살던 신자들이었다. 지금은 대아리 저수지에 잠겨 버려 흔적을 찾을 길이 없지만, 그 옛날 이곳은 진리에 목마른 이들이 숨어 살던 교우촌이었다. 이때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는 62세 된 김성첨(토마스)의 가족 6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믿을 만한 전승에 따르면, 순교자 일행은 형장에 이르러서야 목에 쓴 큰 칼을 벗을 수 있었고, 얼마나 굶주렸는지 짐승처럼 형장의 풀을 뜯어 먹었다고 한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김 토마스는 "지금까지 우리가 기다려 온 천당 진복을 받을 때가 왔는데, 이만한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말이 되겠느냐? 부디 감심하여 고통을 참아 받자."라고 모두를 격려하였다고 한다. 순교 후 그 시신들은 형장 곁에 있던 미나리꽝에 던져졌다. 이것을 눈여겨보고 있던 신자들은 야음을 틈타 시신들을 건져냈는데, 겨울에 입는 솜옷 속에는 솜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배가 고파 솜을 먹어 버린 탓이었다.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시신을 일단 한 곳에 가매장하였다가 훗날 일부를 찾아내 천호산에 안장하였다. 박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순교자들은 임금의 명을 거역한 역적이었다. 그러므로 죽어서도 얼굴을 바르게 세워 하늘을 바라볼 수 없었다. 1983년 5월 10일 (여산 순교자들의) 유해를 천호산에서 발굴하였을 때 순교자들의 두개골은 한결같이 얼굴 쪽이 땅에 엎어져 있었다. 이런 현상은 다른 순교자의 유해 발굴에서도 나타났던 현상이다. 연풍 성지에 묻혀 있는 황석두(루가) 성인도 그러했다. 이러한 현상은 역적의 죄명으로 죽은 사람은 하늘을 보고 누워 있을 수 없다 해서 얼굴을 지표면에 엎어 놓는 풍습과 같다. 이 순교자들도 그런 상태였다. 임금의 명을 어긴 것은 하늘의 명을 어긴 것이니, 죽어선들 하늘을 보고 누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록 시체를 옮긴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였음이 분명한데도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1998년, 324면). 여산 지역에서는 이후 100여 년 동안 참혹했던 당시의 정황이 계속 구전되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참상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지역의 신앙으로 승화되어 왔으며, 순교 터의 흔적이 사라졌지만 숭고한 순교자들의 피는 언제나 신앙 후손들의 마음 안에 간직되어 있었다. 이에 여산 본당 신자들은 1980년대 초부터 여산 동헌 옆의 백지사 터와 숲정이 순교 터 일대를 매입하여 사적지로 조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지금은 순례 기념 성당을 건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11월호]
넓은바위(廣岩, 넙바위) 교우촌 여산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의 주거지 가운데 가장 기억해야 할 교우촌은 넓은 바위이다. 대아리 저수지에서 동쪽으로 5㎞쯤 협곡을 따라 산천리, 왕재, 은천리를 지나면, 산에 묻힌 골짜기에 지금은 흔적마저 찾기 어렵지만 유서 깊은 넓은바위 교우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 교우마을이 생긴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어도, 일찍이 고산 관아에 천주도교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1866년(병인년) 1월 여러 신도들이 체포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상당히 오래된 교우촌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 신도들의 출신지는 대개 경상남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등이었다. 이 교우촌이 겪은 가장 큰 박해는 1868년(무진년)에 있었다. 이때 이 마을에서는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심지어 젖먹이를 둔 여인까지 수십 명이 여산으로 끌려가 그 중 16명이 순교했다. 이들 순교자들 중에서 지도적인 인물은 김성첨(토마스)였다. [출처 : 여산 성당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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